Webbs의 전기 작가인 Lisanne Radice는 전반적으로 Sidney와 Beatrice가 내각에서 실용적인 정치인으로서보다 조직자 및 이론가로서 함께 더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웹 부부는 이미 70대 중반이던 1932년에 러시아로 갔다. 베아트리체는 자본주의가 종말에 이르렀고 러시아가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방문을 주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집단계획은 더욱 실행 가능해졌다. 1930년 말에 베아트리체는 러시아 문학을 읽기 시작했고, 그녀의 선택은 런던 주재 소련 대사와 그의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웹 부부가 러시아에 발을 디딘 것은 스탈린이 급속한 산업화와 농촌 집단화를 추진하기 위해 1929년에 도입한 제1차 5개년 계획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중요한 외국 손님으로 대우받는 웹 부부는 러시아의 이러한 측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레닌그라드의 아스토리아 호텔에 스위트룸이 있었는데, 너무 커서 베아트리체는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왕족이 된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들은 Beatrice의 조카와 결혼한 Manchester Guardian의 모스크바 특파원 Malcolm Muggeridge에게 문의할 수도 있었다. Webbs는 일반 개인이 국가 운영에 참여할 기회가 더 많기 때문에 소련 공산주의가 서구보다 우월하다고 진정으로 믿었다. 자본주의의 성과에 대한 불만이 웹스만큼 잘못된 길로 인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중 하나였다. 또 다른 하나는 나치의 신뢰가 높아지면서 독일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바이마르 시대에는 합리주의자들(과학자, 학계)과 민족주의자들(범독일주의자)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있었다. 그들은 독일, 독일의 역사, 독일의 본능적 우월성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의 영웅, Oswald Spengler는 The Decline of the West에서 독일이 프랑스, 미국, 영국과 어떻게 다른지 강조했으며, 히틀러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이러한 견해는 나치가 권력에 가까워지면서 나치 사이에서 기반을 얻었다. 페이지 한쪽에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와 카를 슈미트-로트더프(Karl Schmidt-Rotduff)와 같은 예술가들의 현대 회화 복제품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기형과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다. 일부는 눈이 튀어나온 것, 다른 것들은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것들은 눈이 부풀어 오른 것이었다. Rosenberg의 가족은 1918년까지 러시아의 발트해 지역 중 하나였던 에스토니아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증거가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의심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는 초기 동료들보다 오랫동안 히틀러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어렸을 때 그는 특히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의 작품을 접한 후 역사에 매료되었다. 체임벌린은 바그너의 결혼 친척인 배신자 영국인이었다. 바그너는 유럽 역사를 '유대교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파괴적인 영향에 맞서는 독일 국민의 투쟁'으로 여겼다. Rosenberg는 1909년 가족 휴가 중 Chamberlain의 ‘19세기 기초’를 접했을 때 변화되었다. 이 책은 그의 독일 민족주의적 감정에 대한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 1920년대가 지나면서 Rosenberg는 Martin Bormann 및 Heinrich Himmler와 함께 Mein Kampf를 넘어서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0년에 그는 국가사회주의의 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믿었던 것을 출판했다. 독일에서는 그 조류가 Der Mythus des 20이었다. 그것은 독일 문명에 대한 주요 위협인 로마 카톨릭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수행한다.
현재 한국 번역가 협회 회원으로 번역하는 사이사이 책을 출간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신봉하며 항상 좋은 책을 출간하고자 하는 저자의 바람은 독자 여러분의 관심으로 그 꿈을 이루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