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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간기 지성사 리뷰 V

포퍼는 비엔나에서 망명한 동료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와 많은 견해를 공유했지만, 자신을 경제학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훨씬 더 폭넓게 다루었다. 열린사회에 즉각적인 박차를 가한 것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안슐루스(Anschluss) 소식이었다. 포퍼는 비엔나 학파의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방법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를 정치에도 적용했다. 하나는 정치적 해결책이 과학적 해결책과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즉, '결코 잠정적일 수 없으며 항상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역사주의의 빈곤, 즉 사회를 통치해야 하는 '강철의 법칙'을 제공할 역사 연구에서 깊은 교훈을 찾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포퍼는 역사 같은 것은 없고 오직 역사적 해석..
포퍼는 비엔나에서 망명한 동료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와 많은 견해를 공유했지만, 자신을 경제학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훨씬 더 폭넓게 다루었다. 열린사회에 즉각적인 박차를 가한 것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안슐루스(Anschluss) 소식이었다. 포퍼는 비엔나 학파의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방법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를 정치에도 적용했다. 하나는 정치적 해결책이 과학적 해결책과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즉, '결코 잠정적일 수 없으며 항상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역사주의의 빈곤, 즉 사회를 통치해야 하는 '강철의 법칙'을 제공할 역사 연구에서 깊은 교훈을 찾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포퍼는 역사 같은 것은 없고 오직 역사적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그는 사회과학이 유용하려면 '예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론물리학이 있듯이 '이론사'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배제했다. 이것이 포퍼를 그의 책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인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에 대한 공격으로 이끌었다. 포퍼는 플라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정의의 해석을 포함하여 국가의 이익을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반동적이라고 생각했다. 포퍼는 플라톤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지만 그는 분명히 플라톤을 기회주의자이자 헤겔의 선구자로 여겼다. 포퍼는 플라톤의 변증법이 논리적인 추론보다는 신화적인 요소가 강하며, 이는 과학적인 방법론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변증법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포퍼는 마르크스를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며 사회의 총체적인 변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로 간주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과학적인 검증을 거치지 못한 추측에 불과하며,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고 보았다.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의 목표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예를 들어 공산주의 선언에 설명된 강령의 대부분이 실제로 서구 사회에 의해 달성되었다고 지적했다. 포퍼는 국가가 최소한으로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의 기본 존재 이유는 정의를 보장해야 하며,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믿음을 하이에크와 공유했다. 그는 계획이 사회의 더 많은 폐쇄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만하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계획에는 역사주의적 접근 방식, 전체론적 접근 방식, 유토피아적 접근 방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모든 것이 시행착오의 과학적 방법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포퍼는 민주주의가 과학적, 시행착오 방법을 구현하고 사회가 경험에 비추어 정치를 수정하고 유혈 사태 없이 정부를 바꿀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정부 형태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가능성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 번역가 협회 회원으로 번역하는 사이사이 책을 출간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신봉하며 항상 좋은 책을 펴 내고자 하는 저자의 바람은 독자 여러분의 관심으로 그 꿈을 이루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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