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러한 병원은 당국이 스캔들을 피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원치 않는 관심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중세에는 주로 수도원이나 자선기관에서 정신질환자를 돌보았으며, 누군가가 범죄 행위로 기소되면 공개 재판이 열려 피고인에게 자신의 범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도록 요구했다. 물론 이는 피고인의 가족들에게 쉽게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었기에, 근대 이후의 병원 감금은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많은 경우, 공개 재판 없이 피고인을 병원에 수용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거리에는 부랑자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고, 가족들에게 어떠한 스캔들의 책임을 물을 수 없었기에 당국은 기뻤다. 그러나 구금된 사람들의 삶은 그리 좋지 않았다.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 과학과 의학은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질병이나 심리적 장애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비극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은 종종 이국적인 동물처럼 취급되었다. 당시 정신 질환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수용된 인구의 10%에 불과했고, 경범죄자나 숨겨진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에게 전시되었다. 놀랍게도, 파리 남쪽 비세트르 병원에서는 이러한 전시가 매주 일요일에 열렸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혁명의 초기 지도자였던 오노레 미라보는 그의 저서 『영국인 여행자의 관찰』(Observations D'Un Voyageur Anglais, 1788)에서 이 혐오스러운 관행을 묘사했다. 그는 비세트르에서 "미친 사람들은 동전을 기꺼이 내는 첫 얼간이에게 호기심 많은 동물처럼 전시되었다"라고 썼다.
현재 한국 번역가 협회 회원으로 번역하는 사이사이 책을 출간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신봉하며 항상 좋은 책을 펴 내고자 하는 저자의 바람은 독자 여러분의 관심으로 그 꿈을 이루리라 확신한다.